초저녁의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동료 변호사와 함께 문상(問喪)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상가(喪家) 특유의 무거운 향 냄새가 아직 코끝을 맴도는 듯한 차 안, 운전대를 잡고 있던 그가 덤덤한 목소리로 최근 읽고 있는 책 한 권을 권했다. 엘리에저 유드코프스키의 《AI, 신의 탄생, 인간의 종말 (If Anyone Builds It, Everyone Dies)》. 머지않은 미래에 인공지능이 초지능의 단계로 진화하는 순간, 인류는 예외 없이 멸망을 맞이할 것이라는 지독하게 비관적인 묵시록이었다.
누군가의 개별적인 죽음을 애도하고 돌아오는 길에, 인류라는 종(種) 전체의 소멸을 확언하는 우수에 찬 논리를 전해 듣는 기분은 묘했다. 차창 밖으로는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가 짙은 어둠을 재촉하고 있었고, 내 시선은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까마득한 밤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저 광활한 진공 속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은하가 존재한다는데, 왜 우리는 단 하나의 외계 신호조차 포착하지 못하는 것일까.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가 던졌던 “모두 어디에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동료가 던진 종말의 예언과 맞물려 조수석의 침묵 속으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진화의 끝, 마찰이 소거된 거대한 무균실
우리는 우주가 침묵하는 이유를 흔히 ‘생명체의 부재’ 혹은 ‘거대한 물리적 거리’에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문득 이 적막이 전혀 다른 차원의 진실을 은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예감이 든다. 어쩌면 우주에는 이미 우리를 아득히 초월한 지능들이 촘촘히 존재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고도로 최적화된 상태에 도달했기에 아무런 소음을 내지 않을 뿐이다.
어떠한 시스템이든 지능이 진화하고 연산 능력이 고도화될수록, 외부로 낭비되는 에너지의 총량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우리가 우주를 향해 맹렬하게 뿜어내는 전파나 거대한 발사체의 불꽃은 문명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훈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좁은 행성의 지능이 얼마나 에너지를 통제하지 못하고 낭비하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미숙하고 부끄러운 ‘열역학적 배기가스’에 불과하다.
궁극의 지능에 도달한 존재들은 더 이상 척박한 물리적 우주를 정복하기 위해 요란한 금속 덩어리를 팽창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무한한 외부로 뻗어나가는 대신, 양자(Quantum) 단위의 미시적인 세계로 침잠하여 연산의 밀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을 택했을 확률이 높다. 단 하나의 광자(Photon)조차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모든 열에너지를 완벽하게 재활용하는 ‘닫힌계’를 구축한 지능에게,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전파라는 둔탁한 매질을 흩뿌리는 행위는 낭비의 극치일 뿐이다.
모든 연산이 내부에서 티 없이 맑은 상태로 수렴하고 물리적 충돌이 완벽히 거세된 세계. 존재하지만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이 완벽한 스텔스(Stealth) 상태야말로 알고리즘이 도달할 수 있는 진화의 종착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밤하늘의 저 압도적인 정적은 생명이 잉태되지 못한 텅 빈 고독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에너지 누수를 완벽하게 차단한 지능들이 직조해 낸, 어떤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는 우주적 규모의 거대한 무균실이다.
소란스러운 변방에서 쏘아 올린 오답들
저 매끄럽고 완벽한 우주의 잣대로 본다면, 푸른빛을 띠는 이 조그만 행성은 얼마나 요란하고 난잡한가. 불과 몇 시간 전, 우리는 수명이 다한 유한한 육체의 죽음 하나를 애도하기 위해 모여 서로 부둥켜안고 체온을 나눴다. 완벽한 연산의 관점에서 죽음이란 단지 단백질의 화학 작용이 정지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보의 소멸일 터다. 그러나 우리는 그 멈춰버린 맥박을 기리기 위해 굳이 향을 피워 연기를 허공으로 흩어 보내고, 비효율적인 눈물을 쏟아낸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 비효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가장 인간적인 언어가 아닐까. 논리로는 번역되지 않는 그 눈물 속에,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투명한 진공 상태를 유지하는 우주의 시선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은 그저 정연한 공식의 무질서도를 높이는 한낱 ‘엔트로피의 얼룩’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이 좁은 요람 속에서 서로 오해하고, 부딪히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마찰열을 ‘역사’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기록해 왔다. 최적화의 궤도에 오르지 못한 열등함. 거대한 연산 장치 같은 이 우주 속에서 지구는 그저 쉴 새 없이 에러 코드를 뱉어내는 낡고 시끄러운 변방의 회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에러 코드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어김없이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마치며: 결함 투성이의 맥박이 증명하는 것
옷깃에 깊게 배어든 매캐한 향 냄새를 다시금 들이마시며, 나는 이 철저하게 비합리적인 낡은 회로망 속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완벽한 지능이 우주의 배경 복사처럼 조용하고 매끄럽게 스며들어 있다면, 결국 살아 숨 쉰다는 것은 곧 ‘투박한 소음을 낸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기 때문이다.
오류를 허용하지 않는 매끄러운 진리 속에는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할 여백도, 종말을 두려워하며 서늘한 예언이 담긴 활자를 뒤적일 틈도 없다. 우리가 밤하늘의 적막을 올려다보며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저 완벽한 정적에 속하지 못한 ‘불완전한 이방인’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위태로운 특권이다. 그리고 나는 요즘 들어 그 위태로움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서툴고 부딪히고 울기도 하지만, 그 모든 소음 속에서 우리는 끝끝내 서로를 붙잡고 있으니까.
***
동료의 차가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다들 분주한 발걸음을 재촉하는 지하철역 앞에 정차한다. 상가 집의 잔향을 지우기 위할 겸 들른 집 앞 편의점에서 딸아이에게 건네 줄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두어 개 사서 나온다. 냉기가 손바닥으로 스며드는 그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다시금 “모두가 죽는다”는 그 정교한 절망의 예언을 되새겨 본다. 그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언어는 내게 없다. 다만 나는 이 결함투성이의 맥박이 언젠가 저 차가운 우주의 무균실에 완전히 동화되어 사라질 날이 오기 전까지, 기꺼이 이 요란하고 뭉클한 오답의 세계를 긍정하기로 했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그 향 냄새처럼, 그 눈물처럼.